예장합동 109회 총회 결의 ‘여성강도권’ 철회를 촉구하며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2:12~14)
지난 예장합동 109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들의 강도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앞으로 헌법 개정과 노회 승인 등의 절차를 거쳐, 시행에 이르기에는 최소 3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이같은 조처가 여성 안수와는 별개라곤 하지만 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며 성경이 말하는 안수와 강도권은 동일한 개념이라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이해의 수준을 애써 부정하는 자기기만과 자기부정의 행위입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 보수의 보루라고 여겼던 예장합동이 여성강도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교단이래야 고신, 합신, 대신 정도.. 그나마 대형 교단으로서 예장합동이 버텨왔는데, 이 교단이 선을 넘었다는 점입니다. 이로인해 한국교회는 더더욱 급속히 세속화의 급류에 휘말리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예장합동 교단의 ‘여성안수(여성강도권)의 인정’문제가 왜 심각한 문제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여성 사역자의 인격과 처우개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평등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하는 성경해석상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삶과 신앙의 절대 규범이자 절대 권위를 가집니다. 성경은 상황논리나 문화논리로 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경은 우리 삶과 신앙의 절대 규범이자 기준입니다. 성경은 시대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성안수(여성강도권)’를 인정하는 쪽에서는 시대 타령을 하고 문화 타령을 하면서 시대가 바뀌었고 환경이 바뀌었으니 가부장적 탈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성경도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형적인 상황논리에 입각한 성경해석 방식입니다. 사도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성경접근법입니다.
상황논리로 가면 이제 모든 것이 다 풀어지게 됩니다.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풀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동성애, 동성결혼, 근친상간, 혼전순결 등등.. 입에 담을 수 없는 많은 죄악들이 실용적 상황논리에 따라 합법화 될 것이고 결국 교회는 거룩의 능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는 서구 교회와 국내 수많은 교단이 걸어간 발자취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과 지위권과 처우는 개선되어야 합니다. 또한 남성이 접근하기 어려운 사역 영역에서는 실제 여성들이 사역을 맡아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대안과 관련해서 우리 ‘마스터스개혁파총회’는 다수의 제안을 한 바가 있습니다. ‘마스터스개혁파총회 헌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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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고 할 때 절대로 상황을 들먹이지 않습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단 두 가지, 하나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에 지음을 받은 창조원리와 또 하나는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류 최초의 죄인이었던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어찌 상황논리로 해석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여성안수(여성강도권)’은 단순히 여성 사역자의 강도권 여부의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이는 성경권위의 문제이며 성경해석의 문제입니다. 근본의 문제이며 본질의 문제입니다. 하여 우리 마스터스개혁파총회는 예장합동 109회기에서 결의된 ‘여성안수(여성강도권)’에 대하여 심심한 유감을 표하며 이러한 비성경적 ‘여성강도권’을 단호히 거부할 뿐만 아니라 성경원리에 따라 귀 결정을 철회할 것을 예장합동 측에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마스터스개혁파총회 대변인 이희수 목사